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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56. <광양공>농암공휘동혁농암기(農菴公諱東爀農菴記)
1. 문헌 목록 〉23. 23世 〉58. <광양공>농암공휘동혁「동혁전」(農菴公諱東爀「東爀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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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광양공>이조참판휘동혁묘갈명(吏曹叅判諱東爀墓碣銘)
이조참판휘동혁묘갈명(吏曹叅判諱東爀墓碣銘) 여천군 화양면(華陽面) 창무리(昌武里) 비봉산(飛鳳山) 신좌(申坐) 인향(寅向)에 6척 높이의 무덤이 있으니 이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조공(趙公) 휘 동혁(東爀), 자 성겸(性謙)의 묘소이다. 공은 고종(高宗) 一八七一(辛未) 四月 初八日에 태어나 一九五六(丙申) 二月 十日에 돌아가시니 수는 八十六세이셨다. 부음(訃音)이 원근에 전해지자 모두 친척의 부음을 들은 듯 슬퍼하였다. 공은 천성이 남달라서 여섯 살 때부터 서당(書堂)에 가서 공부하셨는데 총명함이 출중(出衆)하고 행동거지가 예사 사람과 달라 사람들이 장래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八세때 부상(父喪)을 당하자 슬픔을 못이겨 몸부림치고 울부짖는 것이 예절을 지나쳐 여러 차례 기절하기에 이르렀다. 형을 따라 조석으로 풍우를 피하지 않고 성묘(省墓)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이 공을 따라 죽을 결심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항시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울부짖으니 모부인도 감동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편모(偏母)를 섬기기를 뜻을 받들고 맛있는 음식 봉양하는 것을 겸하여 정성을 다하였고 형 받들기를 부모 모시듯 하여 매사를 여쭙고 행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도정(都正) 벼슬을 하였고 나중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제수하였다. 호를 농암(農菴)이라 하고 스스로 학식이 없다고 겸손하였다. 세태가 더욱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농사를 지으면서 은둔(隱遁)하셨다. 항상 어려서 고아(孤兒)가 된 것을 한스럽게 여겨 평생동안 철천지통(徹天之痛)으로 가슴 아파하셨다. 또한 장지(葬地)가 길지(吉地)가 아님을 알고 열여섯 차례나 이장하였으나 길지를 얻지 못하자 풍수지리서(風水地理書)를 연구하여 정통(精通)한 후에 원근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드디어 길지를 얻어 이장하고 문장(文章) 대가(大家)들의 글을 얻어 묘비를 세웠다. 또 모부인께서 수년간 병을 앓으실 때는 공이 스스로 의서(醫書)를 연구하여 지성으로 시탕(侍湯)하면서 치료하였고 마침내는 의술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친환(親患) 때에는 七日 주야를 한 번도 눈을 붙이지 않고 하늘에 기도드리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으셨으며 천수(天壽)를 다 누리고 돌아가시자 곡(谷)을 하며 울부짖고 예(禮)를 갖추었다. 삼년상을 마치고는 지성껏 마치 계시는 듯한 정성으로 제사를 모셨다. 八十세가 넘으셔서도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부모에 대한 말만 들어도 눈시울을 적시었다. 또 선대를 위하는 정성이 지극하여 여러 대의 묘소에 석물(石物)을 갖추고도 그 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나 종족간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공은 몸가짐에 공경과 의리를 위주로 하였고 집안을 다스리면서는 엄(嚴)과 화(和)를 위주로, 아들과 조카들을 교육하면서는 효제(孝悌)와 근검(勤儉)을 위주로 하였으며 종족간에는 항상 돈목(敦睦)을, 친구 사이에는 항상 신의(信義)를 으뜸으로 하였다.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경하였으며 봄바람처럼 따뜻한 모습이 항상 담소(談笑)하는 사이에 넘쳐 흘렀다. 또 손님을 좋아하여 손님이 끊어지는 날이 없었으며 잘 접대하여 후한(後漢)때 사람 북해(北海) 공융(孔融)의 풍도가 있었다. 그러나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정의감이 투철하여 여러 사람들이 사랑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진면목(眞面目)이었다. 공은 비단 인효(仁孝)와 경의(敬義)를 독실히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하는 충절심도 남달랐다. 한말(韓末)에는 왜적(倭賊)이 점차 침입해오자 이를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을 수 없어 선뜻 일어나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군과 대적하였으니 이러한 나라를 위한 충절은 남보다 뛰어났다고 하겠다. 옥천조씨는 고려 때 문하시중 충헌공(忠獻公) 휘 원길(元吉)을 비조로 하며 조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공신(功臣)인 휘 암(巖)은 공의 十一대조요, 휘 성순(成淳) 휘 자옥(自玉),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휘 영흥(榮興), 증승지(贈承旨) 휘 상록(相祿), 증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공은 공의 고조 증조, 조, 부 사대(四大)의 따님으로 열행(烈行)이 현저하였고 배(配) 정부인(貞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는 현표(玄標)의 따님으로 부덕이 모두 갖추어지셨는데 을해년 十月 十七日에 출생하여 정유년 五月 二十六日에 돌아가시니, 공과는 이봉(異封) 합장(合葬)이며, 배(配) 창원황씨(昌原黃氏)는 一八九三(癸巳) 一月 二十五日에 출생하시어 一九二七(丁卯) 一月 十日에 돌아가셨으며, 묘소는 부우(祔右)이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경훈(炅勳) 창훈(昌勳) 충훈(忠勳) 명훈(明勳) 상훈(尚勳)이다. 손자 관익(官翼) 화익(和翼) 근익(根翼) 주익(株翼)은 경훈의 소생이요, 해익(海翼)은 창훈의 소생이요, 내익(内翼) 광익(光翼) 수익(洙翼)은 충훈의 소생이요 순익(栒翼) 승익(昇翼)은 상훈의 소생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창훈이 공의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청하기를, 막내동생 상훈이 특히 정성과 힘을 다하여 묘비를 세우고자 하니, 원컨대 선생의 글을 얻어 새기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시경(詩經) 기취편(既醉篇)에 효자(孝子)가 끊이지 않아 길이 복(福)을 누리리라고 한 구절이 있는데 선성(先聖)의 말씀이 헛되지 않음을 알겠다. 내가 이찬정(李贊政)이 쓴 전기(傳記)를 믿고 또한 효자의 지성에 감동하여 이에 서문(序文)과 함께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효제(孝悌)와 경의(敬義)야말로 실학(實學) 실덕(實德)인데 공은 이미 이 실덕과 실학을 실천하셨네 누가 감히 공을 일러 하찮은 학문했다고 하리오. 풍류나 금도(襟度), 문학도 학문이라 하겠지만 분별없이 시속 따르지 않음이 진실된 학문이요 선인이니 공은 바로 선인이요 진실된 학문하셨네 창무리 언덕 위에 시비로운 광채 비추이며 비석에 새겨진 글도 백세에 빛이 나리 戊戌年 四月 下旬 月城 金植沅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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